“그 사람… 죽었어.”
머뭇거리던 세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놀란 아소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디서 들은 얘기야? 네가 직접 본 거야?”
세은은 남자가 가끔 손님으로 왔던 것과 경찰이 다녀간 얘기를 아소에게 들려주었다.
[당신, 오늘 티켓을 받겠네요.]
그가 세은에게 했던 특별한 말과 함께.
묵묵히 세은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소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찾아야겠어.”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아소가 하얀 코트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얼굴을 들었다.
“뭘? 이미 죽은 사람을?”
엉성하게 서서 아소를 다독이던 세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블루의 시계라도 가져 가야지. 시계가 있으면 아티스파우스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블루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세은, 내가 블루를 살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아소의 촉촉한 눈동자가 세은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소를 돕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세은의 머릿속에 잔잔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
세은의 집, 2층 테라스 벤치에 세은의 옷으로 갈아입은 아소와 세은이 나란히 앉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둘이 산 지가 꽤 오래된 세은이 집에 친구를 데려온 건 처음이었다.
따뜻한 초코라떼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친구와 함께 테라스에 앉아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별 하나 없는 깜깜한 밤 하늘을 바라보며 습관처럼 세은은 마음속으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까 것 보다 좀 더 경쾌한 느낌이네.”
라떼를 홀짝이던 아소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소, 너 진짜, 진짜 진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야?”
아소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던 세은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게… 아까도 말했듯이 일부러 읽는 게 아니고, 세은 네가 음악을 흥얼거릴 때는 생각하는 소리가 너무 커.”
세은이 대꾸 없이 아소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오해는 하지 마. 시끄럽다는 건 아니야. 세은 네가 만드는 음악 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자꾸 더 듣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나도 모르게…”
무안해하는 아소에게 세은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껌뻑였다.
“세은 네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들은 절대 읽지 않을게. 불편하게 생각하진 말아줘. 근데… 니 음악은 나도 같이 들을 수 있게 허락해 주라. 사실 지금 맘이 좀 불안한데 네가 만든 음악을 듣고 있으면 뭔가 편안해지거든. 블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네가 들려준 음악 덕분에 슬픔이 잊혀지는 기분이 들었어. 같이 듣는 거… 허락해 줄 수 없을까?”
꼭꼭 숨겨두고 한 번도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준 적 없는 세은이 만든 음악.
꾸역꾸역 머릿속까지 들어와 그 음악을 함께 들어준 누군가.
그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행성에서 온 친구.
세은은 그런 아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나… 누구한테 내가 만든 노래를 들려준 건 처음이야.”
세은의 고백에 아소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그럼 난 뭘 해주면 좋을까? 아, 행성인 아소에 대해 얘기해 줄게.”
까만 하늘을 바라보며 아소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구에 온 건 이번이 네 번째야. 내 꿈은 블루 같은 크라운이 되는 거야. 난 지구인들의 스타일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특히 여기, 서울이 좋거든. 볼거리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고, 좋은 음악도 많고. 그래서 역무원이 된다면 서울을 담당하고 싶다고 늘 생각했었어. 그래서 한국말도 열심히 배웠고. 그리고-”
한참 동안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또다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은은 마음속으로 흥얼거리고, 아소는 두 눈을 감고 그 소리를 음미했다.
[세은, 지금은 아까보다 살짝 졸린 거 맞지? 엄청 노곤노곤해지는 멜로디야.]
*
“아몬드 프레즐 세트 두 개 맞으시죠? 소스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다음날, 여느 때처럼 세은은 프레즐 매장에서 열심히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14번 승강장 앞 벤치에 앉은 아소는 세은이 만들어 준 프레즐을 오물거리며 역사에 가득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서울역은 다양한 옷차림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중 행성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안세은, 쟤 뭐냐? 머리 푸르딩딩한 애.”
적당히 손님이 빠진 시간, 커피를 사러 온 준후가 소곤거렸다.
“내 친구야. 아소.”
“아소? 이름이 아소야? 이름도 특이하네.”
뒤를 힐끗 돌아본 준후와 아소가 눈이 마주쳤다.
아소가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자 준후도 얼떨결에 손을 흔들고는 세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은이 내미는 커피를 받은 준후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너, 그 얼굴은 뭐야. 왜 빨개지는데?”
“아아, 아니. 추워서 그래. 추워서.”
“아, 그러셔?”
눈을 가늘게 뜬 장난스러운 표정의 세은에게 준후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진짜 추워서 그래. 근데 쟤, 아니 아소는 왜 하루 종일 저기 앉아 있는 거야? 안세은 너 기다리는 거야?”
“아, 그건-“
“맞다, 오늘 또 경찰이 왔었는데. 여기 다시 오진 않았어?”
세은이 적당한 대답을 찾는 동안 준후가 빠르게 속닥거렸다.
“경찰? 경찰은 왜 다시 온 거야?”
자연스레 전환된 화제가 반가웠던 세은이 얼른 대꾸했다.
“그 살인사건 있잖아. 어떤 남자가 죽은 거. 그거 때문에 왔었어. 여기 가게 CCTV도 확인한다고 말하는 것 같던데 안 왔어? 너 출근하기 전에 왔다 갔나 보다.”
“그런가 봐. 내가 있을 땐 안 왔는데…” “
“사무실에서 들리는 소문에 매박 아저씨가 어제 잡혀 갔대. 근데 그 아저씨 이제 완전히 정신을 놨는지 광대가 어쩌구 기차가 어쩌구 막 이상한 소리만 한다던데? 아티스튼지 뭔지 암튼 진짜 돌았나 봐. 자기가 무슨 시계를 떨어뜨렸다나 뭐라나.”
“광대… 시계? 아티스파우스?”
생각 없이 뱉는 준후의 말속에 하루간 익숙해진 단어가 들리자 놀란 세은이 되물었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알아? 여기 뭐 그런 게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런데 시계라니? 어디에 떨어뜨렸대?”
세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거야 모르지. CCTV 갖고 갔으면 이제 대충 알겠네. 쩌어기 있는 거 화장실 입구까지는 나오지 않을까?”
준후가 가게 코너에 있는 CCTV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세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CCTV! 그게 있었네!”
벤치에 앉아있는 아소를 부를까 잠시 고민하던 세은은 매장 뒤편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는 사장에게 조용히 말했다.
“사장님, 저 인제 좀 쉴게요.”
사장은 대답 대신 손짓으로 알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예랑아, 나 20분 쉰다!”
“응, 알았어~”
세은은 대충 대답하는 예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게 창고로 들어갔다.
섯 개로 분할된 CCTV 모니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지금은 사장님도 있으니까 아소랑 같이 창고에 들어올 순 없고, 내가 먼저 보고 아소한테 알려줘야지. 범인을 찾으면 아소가 말한 블루의 시계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세은은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잡고 날짜와 시간을 아소를 처음 본 이틀 전 밤으로 맞췄다.
10시 반이 넘은 시간 카운터에서 얘기를 나누는 준후와 세은의 모습이 보였다.
준후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가게를 나가고 세은이 가게 정리를 마칠 때쯤이었다.
세은이 경쾌하게 마우스를 클릭해 화면을 빠르게 돌렸다.
가게 밖에 서 있던 세은이 카메라에서 사라지고 11시쯤 다시 잡혔다.
15번 승강장에 들어간 후 준후와 함께 어리버리한 상태로 서울역을 빠져나가던 시간이었다.
준후가 말한 가게 코너의 카메라로 화면을 바꾸고 시간을 다시 맞추자 세은에게서 커피를 산 블루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다.
세은은 화면에 나타난 블루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카메라에 나오는 사람이 범인일 거야. 진짜 매박일까?’
몇 분 후 흐린 카메라 화면에 동작을 감지하는 빨간 불이 들어왔다.
하얀 코트에 하늘색 머리.
블루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선 사람은 아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