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안세은, 안녕?”

어제와 같은 옷차림에 하늘색 머리, 하얀 얼굴의 사람이 세은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어제와 달리 한 쪽은 보라색, 다른 한쪽은 빨간색 렌즈를 끼고 있었다.

“어! 어제 그 미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뜨끔한 세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난 미친이 아니고 아소야. 넌 안세은 맞지? 너 트로파야?”

세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를 ‘아소’라 소개한 하늘색 머리는 다시 알 수 없는 질문들을 시작했다.

“세은이 친구야? 머리 색이 엄청 이쁘네, 어디서 한 거야?”

옆에서 립글로스를 덧바르던 예랑이 아소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은근슬쩍 앞치마를 벗었다.

“어디 가? 설마 오늘 마감까지 나한테 시킬 건 아니지?”

예랑의 수상한 낌새에 세은은 아소의 질문을 뒤로하고 얼른 예랑을 붙잡았다.

“아, 장염 걸렸거든. 아우, 나 배가 너무 아파.”

방금 전까지 프레즐을 뜯어먹던 예랑이 갑자기 인상을 쓰며 배를 움켜줬다.

“야, 여예랑! 어제도-“

“미안 미안, 사장님께는 나중에 니가 말씀 좀 드려줘. 근데 어제 여기서 사람 죽었다며? 으, 소름.”

세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예랑은 후다닥 신고 있던 슬리퍼를 하이힐로 갈아 신었다.

“그 소름 끼치는 곳에 나만 두고 가기 있냐….”

시무룩한 표정의 세은이 웅얼거렸지만 예랑은 못 들은 척 가방을 챙겼다.

그때 번갈아 가며 세은과 예랑의 눈치를 살피던 아소가 예랑을 막아섰다.

“여예랑! 너 어제도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알바 째고, 지난주에도 두 번이나 그러고, 오늘도 이렇게 가버리면 안세은 혼자 엄청 고생할 거란 생각은 안 하니? 좀 있음 바빠질 시간인 거 몰라?”

문 앞을 가로막은 아소가 쏘아대자 예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갑작스런 아소의 행동에 당황하긴 세은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왜 반말이야.”

아소에게 한 마디 던진 예랑이 세은을 보며 말했다.

“너 얘한테 그걸 다 일렀어?”

예랑이 세은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걸 꼭 누가 얘기해 줘야 하니? 그냥 딱 봐도 그렇잖아. 세은이는 착하니까 봐줬지, 딴 애들 같았음 벌써 너 매번 아프다고 뻥치고 데이트 간다고 사장한테 다 말했을 걸?”

스스로도 세은이 많이 참아 준다는 걸 알고 있는 예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오늘은 약속이 있는 것 같으니까 먼저 가고, 내일은 예랑이 니가 세은이 몫까지 일 다 해.”

“아, 알았어. 내일은 내가 다 하면 되잖아. 안세은, 미안. 오늘만 좀 봐주라. 사실 오늘 남자친구랑 백일이란 말야.”

아소의 또박또박한 정리에 무안해진 예랑이 얼버무렸다.

“진작 그렇게 말하지. 다 표나는 거짓말을 왜 하냐? 백일 축하해. 데이트 잘 해라.”

세은이 피식 웃어 보이자 마음이 놓인 예랑은 도망치듯 매장을 빠져나갔다.

피식 웃으며 예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은을 향해 아소가 눈을 찡긋했다.

세은도 아소의 보라색과 빨간색 눈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예랑이 몫까지 혼자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세은은 왠지 마음이 가벼워지며 동시에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미친 애 같진 않은데 어떻게 알았지?’

세은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소에게 예랑의 거짓말을 어떻게 다 꿰고 있냐고 물으려는데, 승강장에 기차가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곧바로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로 역사가 분주해졌다.

프레즐 매장의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혼자 진땀을 뺄 걸 생각하며 세은이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아소가 예랑의 앞치마를 둘렀다.

“혼자는 힘들잖아. 내가 도와 줄게.”

아소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어? 진짜? 시간 괜찮아? 근데 너 알바 해본 적 있어?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나만 믿어.”

차분하게 세은의 귀에 대고 속삭인 아소가 뼛속까지 친절한 목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가장 맛있는 프레즐 나왔어요. 특별히 아몬드 많이 넣었답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담아 드릴까요? 커피가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손님, 쓰레기는 매장 위생 상 버려드리지 않습니다. 저~기 분리수거함 보이시죠? 저기에서 직접 분리수거 부탁드립니다.”

세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소는 이제 딱 알바 경력 한 달을 채운 세은이보다도, 일한 지 삼 개월이 되어 간다는 예랑이보다도 손님을 잘 응대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생글생글 웃는 아소 덕에 오늘은 세은도 지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세은은 혼자였다면 다 던지고 도망치고 싶었을 것 같은 공포스런 피크 타임을 아소와 함께라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한차례 바쁜 시간이 지나고, 여유를 찾은 세은이 아소에게 초코라떼를 만들어주며 말했다.

“고마워, 아소. 덕분에 바쁜 시간 잘 넘겼어. 이제 좀 한가해졌으니까 그만 도와줘도 괜찮아. 오늘 네가 예랑이 대신 두 시간이나 일한 건 사장님께 내가 말씀드릴게. 아마 시급 챙겨주실거야. 내 친구 준후한테도 가끔 그런 식으로 시급 챙겨주시거든. 일단은 계좌번호 적어주면.…”

“괜찮아, 그냥 재미있어서 한 거야. 널 돕고 싶었거든.”

초코라떼를 홀짝이던 아소가 세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를? 왜?”

“네가 만드는 음악을 들어보면 네가 얼마나 좋은 아이인지 알 수 있거든.”

“뭐?”

아소의 갑작스런 말에 세은은 머리를 한대 세게 맞은 것만 같았다.

“지금 음악이라고 했니? 들었다고?”

음악을 좋아하는 세은은 무언가에 집중할 때는 항상 새로운 멜로디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순간의 분위기나 느끼는 기분을 멜로디로 흥얼거려보고, 자기 전에 일기를 쓰듯이 기록하곤 한다.

당연히 좀 전에도 세은은 일을 하며 계속 멜로디를 생각했었다.

할머니도, 오랜 친구 준후도 모르는 세은만의 비밀스런 버릇인데……

아소가 알고 있다는 듯 세은의 버릇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방금 일하면서 계속 멜로디를 흥얼거렸잖아. 그거 네가 만든 음악 맞지?”

“아… 그게… 혹시 내가 소리 내서 흥얼거렸니?”

“아니, 밖으로 소리를 내진 않았어.”

아소가 천진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걸 어떻게… 맞아, 예랑이가 지난주에도 도망간 건 어떻게 알았어? 너 점쟁이 같은 뭐 그런 사람이야?”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에 세은이 두서없이 질문을 쏟았다.

“아, 미안. 일부러 들은 건 아니야. 안 들으려고 했는데 세은이 네가 생각을 너무 크게 하길래.”

아소가 배시시 웃으며 초코라떼를 홀짝였다.

‘생각을 크게 했다고? 그럼, 생각이 들린다는 거야?’

할 말을 잃은 세은이 아소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믿기 힘들었지만 아소는 예랑이가 지난주에 두 번이나 마감을 미룬 것도, 오늘 남친 만나러 가는 것도, 매장의 바쁜 시간도 알고 있었다.

“너, 대체 누구니?”

여전히 얼떨떨한 세은과 눈을 마주친 아소가 싱긋 웃었다.

3 Comments

Leave a Reply